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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차기 미국 대통령)

2020 대선 46대 대통령 바이든 생애

- 2020년 미국 대선이 조 바이든의 사실상 승리로 돌아가면서, 차기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바이든은 오바마 전 대통령의 기록인 6,950만 표를 넘어선 7,000만 표를 넘어서면서 역대 최다 득표율을 기록한 후보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5일 현재 공식적으로는 바이든 264, 트럼프가 214명의 선거인단으로, 당선 기준은 270명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으나 바이든의 당선 유력이 점쳐지는 상황입니다.

 

바이든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할 시, 제46대 미국 대통령으로 2021년 1월에 공식적으로 취임할 것 입니다.

 

 

1. 개요

- 조지프 로비네트 바이든 주니어(Joseph Robinette Biden, Jr., 1942년 11월 20일~)은 미국의 정치인으로, 민주당원이다. 1973년부터 2009년까지 미합중국 상원에서 델라웨어주의 대표를 지냈으며, 2009년 1월 20일부터 2017년 1월 20일까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제47대 미합중국 부통령을 지냈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현직인 도널드 트럼프와 나란히 출마하고 있다.

조 바이든은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과 델라웨어주 뉴캐슬 카운티에서 자랐다. 델라웨어 대학에서 공부한 후 시라큐스 대학에서 법무박사 학위를 취득, 1969년에 변호사가 되어 1970년 뉴캐슬 카운티 의회 의원에 선출되었다.

1972년 델라웨어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미국 역사상 6번째로 젊은 상원의원이 된 바이든은 오랫동안 상원 외교위원회 멤버였으며 위원장까지 지냈다.

1991년 걸프전에는 반대했으나 동유럽으로의 NATO 확대와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전 개입을 지지으며, 2002년에 이라크 전쟁 승인 결의를 지지했지만, 2007년 미군 증파에는 반대했다.

또, 1987년부터 1995년까지 상원 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마약정책, 범죄방지, 시민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었으며, 조 바이든은 폭력범죄 단속법과 여성에 대한 폭력법 통과를 위한 노력을 주도했고 로버트 보크와 클래런스 토머스의 대법원장 지명을 감독했다.

바이든은 미 상원에 6선 재선되었고, 2008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와 함께 부통령에 당선된 후 상원의원직을 사임했을 당시엔 네 번째로 재직 기간이 긴 상원의원 자리에 있었다.

오바마와 바이든은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며, 부통령으로서 바이든은 대불황에 맞서기 위해 2009년 사회간접자본(SOC) 지출을 감독했다.

조 바이든의 공화당과의 협상은 오바마 행정부가 세제 부실을 해결한 2010년 세제구제법, 부채상한 위기를 해결한 2011년 예산관리법, 절박한 재정절벽에 대처한 2012년 미국 납세자구제법 등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

외교정책에서는 미합중국 및 러시아 연방과의 신 START 조약 성립을 위한 노력을 주도하고, 리비아 군사개입을 지지하며, 2011년 미군 철수를 통해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정책 수립을 지원했다.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 바이든은 미국 총기 폭력의 원인에 대처하기 위해 설립된 총기 폭력 태스크포스를 이끌었다.

2015년 10월 바이든은 2016년 선거에서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2017년 1월에 오바마 대통령은 바이든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바이든은 2019년 4월 25일,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면서 2020년 6월에는 당의 지명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1,991명의 대의원 수 한계치를 채웠다.

2020년 8월 11일, 조 바이든은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부통령 후보로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을 발표했다.

 

 

2. 유년기·학창시절

- 1942년 11월 2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아버지 조지프 바이든 시니어(1915~2002)와 어머니 캐슬린(1917~2010) 사이에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는 20대 시절에 요트·자동차 운전이 취미였던 매우 부유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장남인 조 바이든이 태어날 무렵엔 여러 건의 사업에 실패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조의 외조부모 격인 피네건 부부와 수년간 동거해야 하는 등, 바이든 일가는 고달픈 생활을 해왔다.

그 후, 1950년대의 경제 침체 속에서 아버지 조지프 시니어도 생계를 유지할 만한 충분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자 10살 때 델라웨어주 클레어몬트로 이사한다.

그 뒤, 아버지가 근무하던 냉난방용 보일러 청소 업체가 있는 델라웨어주 뉴캐슬카운티의 윌밍턴으로 이사하였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이 곳에서 지낸다.

윌밍턴은 나중에 바이든이 변호사로 처음 개업한 땅이자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택이 있는 땅으로, 그 후 조지프 시니어는 중고차 세일즈맨 자리를 얻게 되었고 바이든 일가는 중산층 가정으로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조 바이든은 클레어몬트에 있는 가톨릭계 사립학교에 입학해 1961년 졸업할 때까지 이 학교에서 지냈다.

재학 중에는 풋볼과 야구에 열중하였고, 특히 풋볼에서는 고등학교 풋볼팀 소속으로 하프백(런닝백의 일종)과 와이드리시버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오랜 기간 패배의 연속이었던 팀을 최종 학년 때에는 시즌 무패를 달성할 때까지의 강팀으로 성장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또한, 정치 활동에 대해서도 윌밍턴의 극장에서 벌어진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농성활동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학업에 관해서는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지만, 바이든은 리더쉽을 발휘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196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뉴어크에 있는 델라웨어대학에 진학해 역사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 당초에는 고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풋볼에 열중하여 델라웨어 대학 팀인 풋볼팀에 소속되어서 처음에는 신입생 팀에서 하프백으로 뛰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때 델라웨어 주외에 사는 연인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대학 대표팀에서 수비수로 뛰는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처럼 스포츠나 친구, 연인과의 교제에 정신이 팔려서 학업성적은 부진하였고, 전공했던 역사학과 정학에서 어찌어찌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1965년에 졸업했으나, 688명중 506번째라는 머슥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오히려 바이든의 주입식 공부에 대한 재능에 놀랐다고 한다(벼락치기?).

그 후 시라큐스 대학의 로스쿨에 진학, 재학 중에는 1년차(1965년)에 법률평론지의 기사를 5페이지에 걸쳐 논문을 표절했다가 발각된다.

1965년 표절 사건으로 해당 과목인 법률적 수법(legal method) 학점은 취소가 되었으나 퇴학처분을 받진 않았고, 바이든은 이듬해 학점을 다시 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 바이든 측은 인용에 대한 정확한 규칙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부주의로 빚어진 것이라며 악의는 없었음을 부인하고 있다.

 


조 바이든은 1968년에 법무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수료 후 이듬해인 1969년에는 델라웨어주 변호사회에 가입, 윌밍턴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로스쿨 재학 중인 1966년, 그는 첫 번째 아내인 네일리어 헌터(1942~1972)를 만나 결혼, 네일리아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보, 헌터, 나오미)를 두었다.

베트남 전쟁 중, 바이든은 대학 재학 중인 1963년부터 로스쿨 재학 중인 1968년까지 소년 시절에 앓았던 천식을 이유로 5차례 징병 유예를 받았고, 이 때문에 베트남 전에는 종군하지 않았다(참고로 아들인 보 바이든은 이라크 전쟁에도 참전한다).

조 바이든은 유소년기부터 말을 더듬는 증세에 시달렸고 20대 전반까지 고생했다고 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시 낭송을 계속 연습했다고 한다. 또, 집안이 알코올 중독자들이 있었기에 그는 철저한 금주가라고 한다.

 

3. 정치활동 초기

- 1969년,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바이든은 뉴캐슬카운티의 군의회 의원에 선출됐고 1970년부터 1972년까지 해당 업무를 봤다.

그 후, 1972년 상원의원 선거에 민주당으로 출마하는데 이때 현직이었던 공화당의 경험많은 복스 의원을 꺾고 승리를 거두면서, 건국 이래 5번째 젊은 나이로 연방 상원의원이 됐다.

그러나 상원의원에 당선된 직후인 1972년 12월 18일, 아내 네일리어는 크리스마스 쇼핑을 위해 3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델라웨어주 호케신으로 차를 몰던 중, 네일리어가 몰던 스테이션 왜건이 교차로에서 트레일러에 추돌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고로 네일리어와 아기였던 나오미가 숨졌고, 보와 로버트는 겨우 살아남았으나 빈사의 중상을 입었으며 추돌한 측의 트레일러 운전자에게는 과실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든은 아들들의 간병 및 뒷바라지를 이유로 의원직을 사퇴하려 했으나,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였던 마이클 맨스필드로부터 사퇴를 포기하라는 설득을 받고 의원직을 수행하기로 결의, 1973년 1월부터 다른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으로 등원해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대체로 의원이 되면 워싱턴 D.C.에 거주하는 의원이 많으나, 조 바이든은 아들들을 위해 매일 편도 1시간 반 동안 윌밍턴 외곽의 자택과 워싱턴 D.C.에서 통근했다.

 

4. 고참의원 으로의 길·두 번째 시련

- 1974년, 바이든은 타임지 200 Faces for the Future 중 한 명으로 선정되는 등 의회 안팎에서 활약의 장을 넓히며 인지도를 높여갔다. 또, 사생활에서도 1977년 현재의 부인인 질 트레이시 제이컵스(질 바이든, 1951~)와 결혼해 1녀(애슐리, 1981~)를 두었다.

바이든은 순조롭게 정치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1978, 1984년 선거에서 경쟁자들을 꺾으면서 3선을 차지하는 등 중진 대열에 합류한다. 그 후에도 1987년에 처음으로 상임위 위원장에 취임하거나 대통령 후보 출마 등 왕성한 활동을 해나간다.

그러나, 이때 영국 노동당 당수의 연설 내용을 도용한 혐의가 제기되었고 1987년 9월에는 학창시절 논문표절을 공식 인정하면서 해당 대학 로스쿨에 사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취소하게 된다.

그러다가 1988년 2월, 45세 때 바이든은 목 통증에 시달리다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알고보니, 목 통증은 뇌동맥류가 파열된 것이 원인이었으며 이때 바이든은 한때 위독한 상태에 빠지는 등 사경을 헤맸다.

이어서 같은 해 5월, 두 번째 뇌동맥류 수술을 받는 등 조 바이든은 더 이상 의정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으나, 힘겨운 재활을 이겨내면서 입원 7개월 만에 기어코 복귀한다.

 

5. 민주당의 중진이 되다

 

 

- 질병 복귀 후, 바이든은 상원의원으로 다시 활약하면서 2008년 6선 연임에 36년차를 자랑하는 압도적 상원 민주당의 중진이 된다. 그는 고향인 델라웨어주 역사상 가장 오래 재직한 상원의원이었다.

2001년부터 조 바이든은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2002년 10월 이라크에 대한 무력행사 허용 결의안 등, 이후 미국 외교를 좌우하게 되는 중요한 국면에 입회했다.

이후 2002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소수당으로 전락하자 새 연방의회가 소집된 2003년 1월 3일자로 외교위원장직을 떠났고, 이번에는 민주당 간사로 당 운영 및 의회 운영에 참여했다. 2004년 대선 출마에도 의욕을 보였지만, 결국 뜻을 접었다.

 


이후, 2006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으로 복귀한 뒤 2007년 1월 4일부터 두 번째 외교위원장직을 맡았으며 또한, 사법위원회에 연계된 범죄 및 불법 약물에 대한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특히, 외교위원회에서는 방통위 지도자로서 또, 외교통으로서 적극적인 발언을 했다.

또, 상원 본회의에서도 꽉 막힌 이라크 정책과 관련해 2007년 9월 26일 공화당의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과 함께 법적 구속력이 없는 이라크 분할 결의를 75 대 23으로 통과시켰다.

 

6. 대통령이 아니면, 부통령이라도...

- 2008년에는 자신의 두 번째 대통령 선거가 되는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으나, 당시 버락 오바마 후보와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양강이 출사표를 던지면서 1월 3일 철수한다. 

그러나 8월 23일, 오바마에게서 부통령 후보 지명 의사가 발표됐고 이를 조 바이든이 수락하면서 8월 27일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바마와 함께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로 정식 지명됐다.

 

 

원래 오바마의 부통령 후보로 언론에서 점찍었던 유력한 인물은 오바마의 최대 대항마였던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치열한 경선 과정에서 오바마와 클린턴 지지자들 간의 감정이 격화됐고, 당내 화합 차원에서도 오바마-클린턴의 드림 티켓이 예상됐다.

그래서 바이든이 선정된 것에 대해서는 적잖이 놀라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이 선택 이유로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바마가 약하다고 여겨지는 유권자층인 백인(특히 백인 노동자)·가톨릭에 강한 것.
▼민주당 중도파 중진인 데다 정치적 사상적 편향이 적다는 점.
*당시 클린턴은 오바마와 같이 민주당에서도 진보적인 성향으로 간주되고 있어, 중도층의 이탈이 염려되었다.
▼오바마에 관해 지적받았던 경험, 특히 외교 경험의 부족을 보완하는 데 있어 외교 경험이 풍부해 국민에게도 외교통으로 통하고 있는 바이든은 오바마의 약점을 잘 보완할 수 있다는 점.
▼의회 대책상, 상원 민주당의 중진인 바이든의 영향력을 기대할 수 있는 점.
▼서민 출신 경력.


본선 선거전에선 오바마가 공격적인 발언을 자제하는 한편, 조 바이든이 매케인에 대한 원색적인 비판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사라 페일린 당시 공화당 부통령 후보 토론회 후 여론조사에서도 토론은 바이든의 승리라고 답한 사람이 다수를 차지한다.

2008년 11월 4일(현지시간) 실시된 대통령선거의 투개표에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가 제44대 미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바이든 자신도 제47대 미합중국 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참고로, 바이든은 대선에서의 패배도 상정하면서 대선과 같은 날 투표로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는 전체 선거구 65%의 표(25만7,484표)를 얻어 경쟁 후보였던 공화당의 크리스틴 오도넬을 큰 표차로 누르고 자신의 7번째 상원의원 당선에 성공했다.

이어서 2009년 1월 3일 개원한 제111기 연방의회에서는 1월 15일까지 상원의원직을 수행하다 이날 사직했다. 또한, 자신이 맡고 있던 상원 외교 위원장직에 대해서는 새로운 의회의 소집을 계기로 1월 3일자로 사직했다.

 


외교위원장으로서 마지막 임무는 1월 둘째 주에 이라크·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3국 순방·정상회담이었다.

바이든의 의석은 오랫동안 그의 어드바이저 역할을 해 온테드 카우프만에게, 외교위원장 자리는 2004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 상원의원에게 인계됐다.

 

7. 부통령 시대

- 2009년 1월 20일, 버락 오바마의 제44대 미합중국 대통령 취임과 함께 조 바이든 자신도 제47대 미합중국 부통령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연방의회 의사당(캐피탈힐)에서 열린 오바마 취임식에는 세컨드 레이디가 된 아내와 함께 참석했으며, 오바마에 앞서 존 폴 스티븐스 연방대법원 판사의 입회 아래 취임선서를 했다.

바이든은 전임자인 딕 체니가 기존 부통령과 달리 정책 결정과 실무 등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행정부 운영에 상당 부분 관여해온 데 대해, 자신은 (체니 전 부통령처럼) 대통령의 정책 결정 등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을 언급한 바 있다.

 

한편으론, [오바마 대통령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그 모든 것에 대해 조언을 한다]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은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계기로 설립한 총기 규제의 강화를 검토하기 위한 특별팀의 수장이 되었다.

 


2017년 1월 12일, 그 동안 부통령으로서의 공로를 기려 대통령자유훈장을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는데, 수상을 미리 알리지 못한 바이든은 눈물을 흘리며 즉흥연설을 20분간 진행했다.

 

8. 다시 도전하는 대권의 꿈

 

 

-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는 임기 제한으로 인해 바이든의 출마가 거론되어, 국가연합(Draft)의 PAC도 결성되었다. 2015년 9월 11일의 시점에서는 출마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동년 10월 21일에 불출마를 표명한다.

민주당 예비경선에서는 오바마 대통령과도 당초 어느 후보에의 지지도 표명하지 않고, 힐러리 클린턴이 지명을 확실한 후인 2016년 6월 9일에 지지를 표명했다.

2017년 6월, 새로운 정치 행동 위원회 [미국의 가능성]을 설립하고, 2020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 출마 검토를 시작했다고 Onebox News가 보도했다. 정치 행동 위원회의 책임자로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두 차례 선거 캠페인에 관여한 그렉 슐츠가 취임했다.

2018년 12월, 몬태나 대학교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향후 6주 이내에 2020년 대선 출마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릴 것임을 천명하였고 2019년 4월 25일, 2020년 대선 출마를 공식 공표했다.

2019년 6월, 민주당 후보 토론회에서 바이든의 퍼포먼스는 혹평을 받았지만, 8월 CNN이 민주당 및 민주당 성향 등록 유권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후보자 조사에선 29%의 지지를 받으며 1위를 차지했다.

2020년 2월 3일, 민주당 지명 후보 경선의 초전인 아이오와주 당원 집회가 개최, 다음날 잠정 결과 발표에서는 중도파인 젊은 후보 피트 부티지지에게 선두를 허용해 4위가 되었다.

그 후에도 고전은 계속 되었지만, 같은 달 29일에 행해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4차전만에 승리하였고, 4월 8일에 끝까지 남은 대립 후보였던 버니 샌더스가 선거에서 철퇴한다.

조 바이든은 같은 달 13일, 거당 체제의 구축을 위해서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민주당 후보의 지명 획득을 확실히 굳히면서 2020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된다.

 

 

9. 인물

▼조 바이든의 종교는 가톨릭으로, 가족도 모두 신자다. 지금도 본인이 살고있는 교회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다.

 

▼술은 전혀 마시지 않는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는 그의 가문이 알코올 의존증을 앓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말더듬으로 고생했고 20대가 될 때까지 낫지 않았다. 여동생에 따르면 바이든은 말더듬증을 치료하기 위해 매일 거울 앞에서 시를 낭독하면서 열심히 발음을 교정했다고 한다.

 

▼애틀랜틱과의 인터뷰에서, 지금도 말더듬 증상이 아직 남아있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매년 12월 18일에는 앞서 언급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첫 번째 아내와 딸 나오미를 추모하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다.

 

▼야구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팬이다.

 

 

▼2010년 3월 23일, 전국민 보험제도의 길을 여는 의료보험 개혁법(일명 오바마 케어)에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을 때, 오바마와 포옹하면서 기쁜 나머지 [This is a big fxxking deal!(이건 XX 존나 대단한 거라고!)]이라고 무심코 발언했고, 관계자는 해명하는데 진땀을 뺐다.

 

▼2019년 3월, 민주당 내부 여성 2명으로부터 여러건의 성희롱 행위가 고발됐다. 조 바이든은 4월 3일, 트위터에 투고한 동영상으로 자신의 성희롱 문제에 대해 해명했다.

 


그 후로도 고발은 계속 되면서 4월 5일 현재, 7명의 여성이 자임하고 있는데, 오바마 정권 당시 부통령 시절부터 그의 과도한 여성(미성년자·아동 포함) 접촉은 일부 미디어·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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