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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코너리 사망 (007 제임스 본드)

숀코네리 별세 생애 인디아나존스

- 영국의 전설적인 첩보영화 007 시리즈1대 제임스 본드이자, 인디아나 존스헨리 존스 박사로 우리에게 친숙했던 배우 숀코너리(숀코네리)향년 만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그의 위대했던 연기인생추모할 겸, 숀코너리 사망과 인생을 다루어보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하세요.

 

 

1. 개요

- 본명 [토마스 숀 코너리 경(Sir Thomas Sean Connery, 1930년 8월 25일 ~ 2020년 10월 31일)]은 스코틀랜드의 배우 겸 프로듀서로, 그는 7편의 본드 영화에 출연하면서 [제임스 본드(James Bond)]라는 인물을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연기한 배우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숀코네리는 2006년에 연기생활에서 은퇴했으며, 그의 업적은 아카데미상 1개,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2개, 세실 B. 드밀상 등 골든글로브 3개 등 다양한 수상을 했다.

1999년에는 미국에서 평생 공로상을 받았으며, 2000년 새해에는 기사작위(Knight Bachelor)에 서훈되면서 숀코너리 경(Sir)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숀코네리는 2004년 The Sunday Herald에서 The Great Living Scott로, 2011년 EuroMillions 조사에서 Scotland's Great Living National Treasure로 선정되었으며, 피플지에 의해 1989년과 99년에 [현존하는 가장 매력적인 남성]으로 꼽히기도 했다.

 

 

2. 유년시절

-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토마스로 명명된 토마스 숀 코너리는 1930년 8월 25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파운틴브릿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맥린은 청소부였고, 아버지인 조셉 코너리는 공장 노동자와 화물차 운전사였다.

숀코네리의 조상은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 이민을 왔으며, 그의 외조부모는 스코틀랜드 파이프 출신과 스코틀랜드의 이너헤브리디스 제도 최대의 섬인 스카이 우그 출신이었고, 게일어 화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는 개신교 신자였으며, 그에게는 닐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숀코너리는 배우가 되기 훨씬 전 부터 자신의 중간 이름인 []으로 불렸다고 말하면서, 그가 어렸을 때 셰이머스라는 아일랜드 친구가 있었고 코네리를 숀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설명했으며, 젊었을 때 [토미]라고 부르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는 키가 작았지만, 12세 전후로 급성장하면서 18세 때 이미 6피트 2인치(188cm)의 장신이 되었다(참고로 1950년대 영국인 평균 신장은 175cm였다). 그는 10대 때 [빅탐(Big Tam)]으로 알려져 있었고, 14살에 ATS(Auxiliary Territorial Service, 여자국방의용군) 유니폼을 입은 성인 여성에게 동정을 잃었다고 회고한다.

숀코네리의 첫 직장은 에든버러에서 우유 배달원으로 일했는데, 훗날 코너리는 어느 택시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최근 에든버러 영화제에서 택시를 탔을 때, 운전사는 내가 지나가는 거리 이름을 알고있는 사실에 놀랐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하고 그가 물었다. "내가 어렸을 때, 이곳에서 우유를 배달하곤 했어요."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운전사는 "그래요? (그러면) 이제 뭘 하고 계시죠?" 그것은 대답하기 다소 어려웠다]

1946년, 16세의 나이로 숀코너리는 영국 해군에 입대했고, 그 기간 동안 두 개의 문신을 몸에 새겼는데 가족과 자신의 고향 스코틀랜드에 대한 문신(Mum and Dad, Scotland Forever)이라고 한다.

 

그는 포츠머스에서 해군 포병학교와 대공 대원을 훈련시켰으며, 나중에 HMS Forgany에서 마도로스로 임명되었다. 후에 숀코네리는 십이지장궤양 때문에 19살때 해군에서 제대했는데, 이것은 그의 이전 세대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영향을 미친 질환 중 하나다.

그는 입대 전 다니던 협동조합에 복귀한 다음, 트럭 운전사, 수영장 안전요원, 에든버러 예술대학 모델인 등 여러가지 직업을 거쳤다.

그 중 모델로 한 시간에 15실링의 수입을 올렸는데, 당시 코너리를 그렸던 [리처드 드마르코(CBE Richard Demarco, 1930~)][매우 직선적이고, 약간 수줍음이 많고, 또한 말로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가상의 아도니스]라고 묘사했다.

 

코네리는 18살 부터 보디빌딩을 시작했고, 1951년부터 영국 육군 출신 전직 체육 강사인 엘링턴과 함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는데, 그의 공식 웹사이트에선 그가 1950년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식통들은 그가 1953년 대회에 주니어 클래스 3위를 차지했거나, 수상에 실패했다고 주장하나 아직까지 두 주장 모두 확실하지 않다.

코너리는 [미국인들은 근육 크기로 대회에서 자주 자신을 이겼고, 나와 다르게 근육량이 줄어들 수 있는 운동 활동에 참여하길 꺼리는 걸 알게 되었고, 곧 보디빌딩을 단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숀코네리는 젊은 시절에 보니릭 로즈(Bonnyrigg Rose , 現 스코틀랜드 5부리그)에서 뛰었던 축구선수였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감독 [맷 버스비(Sir Matt Busby, CBE, 1909~1994)]의 눈에 띈적이 있다.

버스비는 그의 체력에 감명을 받았고, 경기 직후 코너리에게 주당 25파운드(현재 기준으로 약 103만 원)의 계약을 제안했다고 한다.

숀코네리는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고 인정하면서도, [30세가 되면 정상급 축구선수가 내리막길에 접어든다고 생각했다. 나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고,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증명되었다]

 

 

3. 1950년대

 

-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숀코네리는 1953년 런던에서 열린 보디빌딩 대회에서 경쟁자 중 한 명이 연극배우 오디션이 열린다고 언급했고, 코너리는 Seabees 합창단 중 한 명인 작은 배역을 차지하는 등 사소한 역할을 맡게된다.

이때, 숀코네리는 에든버러에 있는 동안에 Valdor 갱단의 표적이 되었는데, 당구장에서 시비가 붙은 그와 6명의 갱단원을 상대로 당시 강건한 신체를 바탕으로 그들을 물리쳤고, 갱단원들에게 큰 존경을 받으며 [강인한 남자]라는 평판을 얻게된다.

 

코너리는 1954년 영화 제작 파티에서 영국의 저명한 원로배우 [마이클 케인(Michael Caine, 1933~)]을 처음 만났고, 이후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됐다.

1954년 [허버트 윌콕스(Herbert Sydney Wilcox, 1890~1977)][Lilacs in the Spring]에서 숀코네리는 엑스트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

코너리는 이후로 엑스트라 역할을 여러 차례 확보했지만, 생계가 빠듯한건 여전했으며 아이를 돌보는 아르바이트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배우로써의 매력은 이미 뛰어났는지, 여배우 [셸리 윈터스(Shelley Winters, 1920~2006)][키가 크고 매력적이며, 남성적인 스코틀랜드 인]이라고 묘사했다.

그 뒤, 숀코네리는 50년대 대부분의 시기를 단역과 엑스트라를 전전하면서 내공을 다져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멜로드라마 [다른 시간 다른 장소(Another Time, Another Place, 1958)]에서 주연을 맡아 영화 촬영 중, 같이 호흡을 맞추고 있던 여배우 [라나 터너(Lana Turner, 1921~1995)]의 남자친구이자 갱스터였던 [조니 스톰파나토(Johnny Stompanato, 1925~1958)]에게 바람을 피운다고 오해받는다.

성질이 괴팍했던 스톰파나토는 영화 세트 위로 난입, 숀코너리를 향해 총을 겨눈뒤 폭행을 하는 바람에 경찰까지 출동했고, 이후 스톰파나토는 미국으로 쫓겨난다. 그러나 한동안 코네리는 스톰파나토의 조직원에게 위협을 받는 등, 한동안 숨죽여 지내야 했다.

 

 

4. 1962~1971, 1983년 (제임스 본드 시대)

 

 

- 코너리의 돌파구는 바로 영국의 비밀 요원 제임스 본드의 역할에서 나왔다. 그는 처음에 007 시리즈에 전념하는 것을 꺼렸지만, 만약 영화가 성공한다면 그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본드 영화에서 007을 연기했다.

출연한 작품은 [살인번호(Dr. No, 1962)],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 1963년)], [골드핑거(Goldfinger, 1964년)], [썬더볼 작전(Thunderball, 1965년)],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 1967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 1971년)], [네버세이 네버어게인(Never Say Never Again, 1983)]으로, 7편의 영화 모두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숀코네리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는 미국 영화 연구소가 선정한 [영화 역사상 세 번째로 위대한 영웅]으로 선정되었다(첫 번째는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 두 번째는 인디아나 존스).

코너리가 제임스 본드 역으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은 [앨버트 R. 브로콜리(Albert R. Broccoli, 1909~1996)]의 아내 다나 브로콜리 덕분인데, 그녀는 코네리가 적임자라고 남편을 설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제임스 본드의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Ian Lancaster Fleming, 1908~1964)]은 원래 [제임스 본드의 모습이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다. 나는 너무 성장한 스턴트맨이 아닌 본드를 찾고 있다]면서 혹평했다.

 


그러나 플레밍의 여자친구였던 블랙웰이 [코너리가 필요한 매력적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고, 플레밍은 살인번호가 성공하자 마음을 바꿨다.

그는 매우 감명받았고, 코네리를 위해 1964년 소설 두 번 산다에서 본드의 아버지가 스코틀랜드인이었고 글렌코 출신이라는 설정을 추가했다.

 

숀코너리의 제임스 본드 연기는 [테런스 영(Terence Young, 1915~1994)] 감독의 스타일리시한 방식에 힘입은 바가 크다. 테렌스는 그의 신체적인 우아함과 존재감을 액션에 사용하면서 코네리의 연기를 빛내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미스 머니페니(Miss Moneypenny)] 역을 맡은 [로이스 맥스웰(Lois Maxwell, 1927~2007)][테런스가 숀을 저녁 식사에 데리고 가서 걷는 법, 말하는 법, 심지어 먹는 법까지 보여주었다] 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감독의 과외는 성공적이었고 코네리는 첫번째 작품인 살인번호 개봉 후, 일주일 동안 수천 통의 팬레터를 받았다.

 

 

참고로, 1965년 썬더볼 작전 촬영 중에 아찔한 사고가 있었다. 극 중 악역인 [에밀리오 라르고(Emilio Largo)]의 수영장에서 상어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숀은 대본을 읽을 때 이 점에 대해 걱정했다.

숀코너리는 수영장 안에 특별한 투명유리로 된 칸막이를 만들라고 요구했지만, 이것은 고정된 구조가 아니었고 상어 중 한 마리가 그곳을 비집고 통과하자, 그는 물리기 전에 수영장을 빠져나왔다.

 

 

5. 제임스 본드 시대 이후

- 제임스 본드는 숀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지만, 코네리는 [제임스 본드에 질렸다], [나는 항상 제임스 본드를 증오해왔다]고 말하며, 007 시리즈가 그에게 가한 역할과 압박에 싫증이 났고 심지어 [죽이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그의 절친인 마이클 케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당신이 그의 친구였다면 본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것 이다. 그는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배우였다.

그러나 그는 본드와 동의어가 되었다. 길을 걸어가면 사람들이 "이봐, 제임스 본드가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특히 그를 열받게 만들었다]

물론, 숀코너리는 본드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에도 세계적인 영화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Sir Alfred Hitchcock, KBE, 1899~1980)][마니(Marnie, 1964)][시드니 루멧(Sidney Lumet, 1924~2011)][더 힐(The Hill, 1965)]과 같은 다른 영화에도 출연했다.

코네리는 본드와 관련이 없는 것에 출연하기를 원했고,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스타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더 힐은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으나,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 후에도 1975년 [왕이 되려던 사나이(The Man Who Would Be King)], [바람과 라이온(The Wind and the Lion, 1975)], [로빈과 마리안(Robin And Marian, 1976)] 등, 숀은 본드를 연기하면서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고, 준수한 연기력으로 사랑받았다.

 


코너리는 1983년 10월 발매된 네버세이 네버어게인에서 마지막으로 나이든 007요원으로 등장하는 것을 합의했다.

이 영화는 흥행에선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감독과 제작자의 갈등, 재정적인 문제, 플레밍 부동산 신탁 관리자들의 영화 중단 시도, 그리고 액션배우 [스티븐 시걸(Steven Seagal, 1952~)]에 의해 숀코네리의 손목이 부러지는 등 제작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 때문에 숀은 2년 동안 영화를 한 편도 제작하지 않다가,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1986년)]이 BAFTA상을 수상하며 상업적인 소재에 대한 코너리의 관심이 되살아났다.

같은 해, [최후의 하이랜더(Highlander, 1986)]에서 그는 젊은 주연들에게 멘토의 역할로 멋진 연기능력을 선보이면서 이것은 그의 후기 영화들 중 많은 부분에서 반복적인 역할이 되었다.

그 뒤에 숀은 유명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Allan Spielberg, KBE, OMRI, 1946~)]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 1989년)]에서 주인공의 아버지인 [헨리 존스(Henry Jones, Sr.)] 역을 맡았으며, BAFTA와 골든글로브상 후보에 올랐다.

주인공이었던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 1942~)]는 글쓰기 단계에서 코네리의 기여가 영화를 향상시켰다고 말했다.

 


[나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글쓰기 단계에서 그가 제안한 것은 정말로, 원작의 각본보다 인물과 그림이 훨씬 더 복잡하고 가치 있게 되었다]

 코너리의 후기 영화로는 [카멜롯의 전설(First Knight, 1995년)], [함정(Just Cause, 1995년)], [어벤저(The Avengers, 1998년)], [젠틀맨 리그(The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 2003년)] 등, 여러편의 영화에 참가하면서 후반기 영화배우 인생을 빛냈다.

숀은 세계 영화에 대한 뛰어난 예술적 공헌으로 크리스탈 글로브를 받았으며, 2003년 영국의 지상파 방송국인 채널 4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였던 100대 영화배우 순위에서 8위에 올랐다.

그러나 젠틀맨 리그의 흥행과 비평, 모두의 실패와 특히 촬영 중 제작이 [궤도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코너리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고, 다시는 이런 스트레스를 겪지 않기위해 연기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숀코네리는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The Lord of the Rings Film Trilogy)]에서 간달프 역을 제안받았지만, [대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거절했다.

 

만약에 코네리가 이 역할을 수락했다면, 전세계 박스오피스 수익의 15%와 함께 3,000만 달러를 추가로 받으면서, 약 4억 5천만 달러(약 5,105억 2,500만 원)를 벌었을 것이라고 한다(참고로 매트릭스 영화 출연도 고사했다).

 

6. 은퇴, 그리고 사망

 

 

- 숀코너리는 2006년 6월 8일, 미국영화연구소의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면서 연기 은퇴를 확정지었다. 2007년 6월 7일에 그는 4번째 인디애나 존스 영화에 출연할 것이라는 루머를 부인하면서 [은퇴는 겁나게 좋다]라고 말했다.

그 뒤, 코네리는 2012년 애니메이션 영화 [미스터 빌리: 하일랜드의 수호자(Sir Billi the Vet)]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잠시 복귀하기도 했으며, 80분 확장 버전 제작자로도 활동했다(해당 애니메이션은 CG, 스토리 모두 추하다는 평가를 들으면서 폭망).

 


거의 은둔하면서 조용히 지내던 숀코네리는 2020년 10월 31일, 바하마 나소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90세의 나이로 수면 중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

그의 사망은 같은 날 가족과 이온 프로덕션에 의해 발표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한 동안 몸이 좋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미 몇년 전부터 나이가 나이인지라 숀은 지팡이를 짚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는 등 건강이 좋지 못했다.

 

7. 사생활

▼숀코너리는 매력있는 캐릭터로 여러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곤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 겸 페미니스트인 질 크레이그의 딸 줄리 해밀턴이 회상하길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답다]라고 말 할 정도였다.

▼여성에 대한 편력이 있었는지, 숀코네리는 여배우에게 데이트를 하다가 해당 가족의 경고를 받기도 했고 심지어 유부녀에게도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숀은 호주의 배우 다이앤 클라이언토와 1962년에 결혼하였으나 1973년 이혼했는데, 2006년에 다이앤이 낸 자서전에는 코너리가 정신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그녀를 학대했고, 그럴때마다 [별일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해당 논란은 생각보다 컸으며, 이 일로 숀은 스코틀랜드 의회 출석도 취소하면서 [여성에 대한 어떠한 학대도 용납할 수 없다]며 부정했다

▼숀은 다이앤과 이혼한 뒤, 모로코계 프랑스 화가인 미슐라인 로크브루네와 재혼한다.

▼숀코너리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매우 컸다. 그래서 축구 클럽인 레인저스 FC도 후원하였고, 중도좌파이자 스코틀랜드 독립국가 건설이 목표인 스코틀랜드 국민당을 재정적으로 지원까지 했다. 다만, 2001년 영국 의회에서 정치 활동에 대한 해외 자금 지언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재정지원은 중단된다.

▼개인적으로 세금 탈세 혐의로 상당히 본인의 커리어에 흠집을 냈다. 특히 1999년에 스페인에 있는 자신의 별장들을 매각한 혐의로 스페인 당국에 탈세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금 망명자라는 비난에 대응하고자, 코네리는 세금을 냈다는 문서를 여러차례 공개했으나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가 영국에 계속 거주했다면 더 많은 세금을 냈을 것]이라며 지적했다.


*자세한 숀코너리의 경력과 또 다른 리뷰는 아래 바로가기를 참고해주세요.

[숀코네리 필모그래피(영어위키)]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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