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전태일 분신 (근로기준법)
노동운동가 50주기 평화시장 이소선 박정희
- 2020년은 노동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전태일 님의 서거 5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특히 전열사가 서거하신 11월 13일에 맞추어서 노동업계에선 대대적으로 추모 및 아직까지 미흡한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환경등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도 있었습니다.
비록 만 22살의 어린 나이에 전태일 본인은 세상이 바뀌는 것을 채 보지못하고 서거하셨지만, 당시 그가 외쳤던 노동자 권리 보장과 근로기준법 준수라는 처절한 외침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지금까지도 그 정신은 길이 빛나고 있습니다.
1. 전태일 프로필



▼본명: 전태일(全泰壹)
▼출생: 1948년 9월 28일
▼사망: 1970년 11월 13일 (22세)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부
▼사망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사인: 분신으로 인한 극단적 선택
▼학력: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1학년 중퇴
▼직업: 재봉사, 노동자, 노동 및 인권운동가
▼종교: 감리교
▼부모: 전상수(1924~1969), 이소선(1929~2011)
▼형제자매: 여동생 2명, 남동생 1명



*고등공민학교란? - 중학교 과정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취학연령을 초과한 사람 또는 일반 성인을 위한 학교로, 1970년대에는 학생 수가 한때 7만 명에 달했으나 이후 중학교 진학의 기회가 넓어지고, 의무교육 추진 등으로 현재는 3개 학교만 남아있습니다.
2. 전태일 생애 (유년기~청소년 시절)



- 전태일 열사는 1948년 9월 28일, 대구 남산동에서 당시 가난한 노동자인 전상수와 이소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전상수가 사기를 당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생활 전선에 뛰어들자, 전태일도 따라서 서울로 상경해 1954년 서울 남대문국민학교(남대문초등학교의 전신으로 70년대말 폐교)에 입학한다.
워낙에 가난했기에 전태일의 가족은 서울에 상경했을때 처음엔 서울역 근교인 염천교 밑에서 노숙을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만리동 일대에서 동냥을 하고, 아버지는 봉제일을 하면서 겨우 월세방을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1960년, 다시 대구로 내려가게 되었고 전태일은 각종 행상일을 하면서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며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다.



1963년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으나, 아버지 전상수가 그 해 겨울 전태일에게 자퇴를 강요하여 1년도 안되어서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이때 좌절한 전태일은 며칠동안 가출을 했으나,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재봉일을 억지로 배우게 된다.
그 뒤, 1964년에 동생인 전태삼을 데리고 가출해 서울로 다시 상경하면서 평화시장 의류제조회사에서 견습공인 시다로 일한다. 여기서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피복점 보조로 취업, 14시간 노동을 하면서 겨우 일당 50원을 받게 된다(당시 차 한잔 값에 불과했다).
1965년 구두닦이를 하던 전태일은 그 해 가을에 의류제조 회사였던 삼일사에서 시다 구인광고를 보고 해당 회사에 입사한다. 당시 전 열사의 고된 나날에 대한 심정은 다음과 같다.

2-1. 노동운동에 뛰어들다



- 1965년 삼일사 미싱사의 재봉사로 일하면서 당시 여공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위생, 14시간 이상의 살인적인 노동환경을 보면서 자연히 노동운동과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전태일 열사는, 1966년 폐렴으로 해고된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삼일사에서 해고된다.
그 해 여름에 평화시장 2층에 있던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직, 회사의 재단사가 해고되자 재단사 자리로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일당은 매우 짰고, 67년 2월 무렵에 잠시 하숙집 딸과 연애를 하였으나 여러 문제로 금방 포기한다.
고된 노동자의 생활 중에서도 배움의 끊을 놓지 않았던 전태일은 자신의 바지와 곤로를 팔면서 책과 노트를 사 3일 동안 밥을 굶을 정도로 그 열망이 대단했다.
당시 쪽지에 남긴 전태일의 심경은 다음과 같다.



"내일부터 23일까지 금식이다, 설마 3일 금식에야 죽지 않겠지. 정신수양의 금식이야.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콧잔등이 시큰해오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내년 3월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앞으로 376일 남았구나. 하루에 2시간씩 공부하면 내년에는 대학입시를 볼 수 있겠지."
1968년, 전태일은 우연하게도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다. 해당 법은 6.25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5월 10일에 제정된 대한민국의 법률 제286호로,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고 향상시키며 균형있는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제정된 법이었다.
분명히 법으로 규정되어 있던 최소한의 근로조건이 정작 현장에서는 전혀 지켜지지 않자, 분노한 전태일은 [바보회]를 창립해 평화시장에 같이 일하고 있던 노동자들을 위해 근로조건의 부당함을 알렸고, 근로실태를 조사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에 투신하게 된 전태일을, 처음에 어머니 이소선은 걱정하며 말렸으나 1969년 6월에 아버지 전상수가 고혈압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아들의 노동 운동을 막지 말라는 유언을 듣고 말리지 않게 된다.



1969년 6월부터 바보회의 회원을 모집한 전태일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당하고 사나, 우리도 깨우쳐 바보로 남지 말자]라는 취지를 설명했으며, 실제로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를 변호하면서 재입사 또는 해고를 막자 바보회에 참여하는 회원이 서서히 늘게된다.
당연히 당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회원을 모집하는 것 부터 어려웠고, 주변에선 비웃음과 냉소, 바뀌지 않는 노동청과 근로감독관 그리고 정부의 나팔수에 불과한 언론 등, 전태일 개인 한명이 바꾸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세상이었다.
전태일은 하루에 14시간 씩 노동을 하면서도, 밤을 새어가면서 근로기준법 조문을 일일히 암기하면서 노동자의 환경을 개선하고 불의에 저항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청, 동대문구청 등을 찾아가 호소했으나, 상기했듯이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과는 늘 바뀌지 않았다.



1969년 9월~1970년 4월까지 일용직 건축 노동자로 일하던 전태일은 감리교회 주일학교 교사로도 활동하면서, 평일에는 자신이 다닌 교회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당 교사로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면서 열일했다.
그 뒤, 4월부터 8월까지 서울 삼각산 임마뉴엘 수도원 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잡역부로 일하다가, 8월부터 9월까지 한 달동안 미싱회사에서 일했다.
전태일은 노동청이나 언론등에서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진정서를 정중한 표현과 노동환경을 개선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채워 보냈으나, 박 대통령에게 도달하지도 못하고 중간에 소거된다.



1970년 9월 왕성사의 재단사가 된 전태일은 바보회에서 한단계 발전된 [삼동친목회]를 조직, 노동실태를 조사한 설문지를 돌리면서 서명을 받았고,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라는 이름으로 다시한번 노동청에 진성서를 제출한다.
이것이 당시 경향신문에 실리면서 주목을 받았고, 전태일을 비롯한 삼동친목회 회원들이 노동 시간, 임금, 노동 환경 개선, 노동 조합 결성 등을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하였으나 무산되었고, 오히려 사회주의 조직이라는 굴레를 씌워버려 노동운동 참여 자체를 방해한다.
이처럼 모든 시도가 막히거나 방해를 받자, 전태일은 엄청난 결심을 하게 된다.
2-2.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 전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노동자 하나 제대로 보호도 못하는 무능한 법으로 고발하자는 취지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결의, 플래카드와 피켓 등을 준비해 시위를 펼친다.
그러나 경찰과 사업주 들의 방해로 또 다시 시위가 무산되자, 오후 1시 30분 경 전태일은 평화시장 골목에 석유와 휘발유를 자신에 몸에 들이붓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마라!]를 외친다.
이때 전태일의 친구인 신원미상의 남자가 그에게 불을 붙이면서 전열사의 몸은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자 국민은행 앞길로 뛰쳐나간 전태일은 몇 마디 구호를 중얼거리다가 분신으로 인한 고통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지게 된다.
전태일의 몸은 약 3분 가량 불타올랐고, 한 친구가 소리를 지르면서 잠바로 불길을 덮어서야 꺼졌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어쩔줄을 몰랐다고 한다.
2-3. 하늘의 별이 되다.



- 병원으로 실려간 전태일은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내가 못다한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긴다.
인근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분신으로 인해 손상된 근육이 굳어지면서 몸이 펴지지가 않았다. 이때 화기를 가시게 하는 1만 5천 원 짜리(당시 쌀 두가마니 가격) 주사를 맞기위해 어머니가 당시 병원까지 따라온 근로감독관에게 보증을 부탁했으나 [그걸 내가 왜 하냐?] 라며 매몰차게 거절한다.

다시 성모병원으로 후송된 전태일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회복될 기미도 없이 11월 13일 밤 10시 경,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요절한다. 항년 만 22세의 너무나도 싱그러운 청춘의 시기에 덧없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전열사가 서거한 11월 13일은 13일의 금요일 이었다.
전열사는 그날 저녁,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눈을 뜨며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라고 말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3. 전태일 분신 사후



- 전태일 분신으로 인한 사후, 평화시장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노동조합]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전태일 분신은 노동계 전반에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으며, 대한민국에서 노동운동이 불타오르는 단초가 되었다.
감히 고용주와 정부에 투쟁할 생각도 못하던 순진한 노동자들은 전태일의 분신으로 각성, 이후 다른 노동자들의 분신과 파업투쟁, 농성 등의 투쟁으로 이어지면서 이듬해 1971년에는 1,600여건에 이르는 단결투쟁이 발생한다. 이것은 1970년도 165건에 비해 10배 가까이 늘어난 규모였다.
물론, 일부 노동자를 비롯한 사업가들은 냉소했고 비웃었다. [자기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바뀌나]라는 말로 전열사의 죽음을 폄하했고, 그저 노동자 하나 죽은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후,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 자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국회에서 노동 운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유언을 받들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청계천의 노조 지원과 노동 운동에 뛰어들면서,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활약하게 된다.
1972년 부터 전태일의 추도식은 해마다 열리게 되었고, 1984년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으며 이듬해 85년에는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그리고 [전태일재단]이 조직되면서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도 제정되면서 수여가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매년 11월에는 전태일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노동자 대회가 열리고 있고, 2002년에는 전태일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승격하면서 지금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4. 더보기